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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실상 Ⅰ: 감추기와 드러내기

요즈음 딸을 낳는 어머니는 딸 낳은 설움(?)과 함께 또다른 걱정거리를 떠안고 있다.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특히 어린이 성폭행이 흔한 세상에서의 '딸아이 지켜내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다양한 수법의 성폭력 범죄와 그 흉포성, 그리고 우리나라 강간 발생률이 세계 3위라는 최근의 충격적 보도는 성폭력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범죄로 만들었고 여성의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첫 번째 요인이고, 남자들은 혼자 집에 남아 있는 아내 걱정, 딸 걱정으로 하루를 조바심 친다. 이렇게 여성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불안에 떨게 하는 성폭력문제를 더 이상 여성들의 몸조심, 문단속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성폭력 문제의 실상과 본질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한다.


감추어진 성폭력의 실상

검찰청 집계에 따르면, 1975년 2744건이던 강간범죄는 1980년 이래 매년 5000여 건 이상 보고되어 갈수록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989년의 법무부에서 발표한 '범죄백서'에 의하면 신고율은 실제 발생건수의 2.2%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를 근거로 계산해 보면 한해 25만 건, 하루 685건, 한 시간에 29건, 2분마다 1건의 강간이 발생하는 셈이다. 실로 엄청난 숫자다. 결국 성폭력의 실체는 이제까지 거의 은폐되어 온 셈이다. 그래서 한 여성지는 만평에서 신고만 제대로 했다면 한국이 성폭력 발생율 세계 1위일 것이라고 꼬집고 있다.

드러낸 것보다 숨겨진 것이 훨씬 많아

또한 전철이나 버스에서의 추근거림, 사무실 등에서의 성적 희롱, 음란 전화 등의 성폭력은 우리나라 여성의 76%가 일생에 한 번쯤은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2%의 겉으로 드러난 성폭력을 살펴보면 "컴컴한 골목에서 모르는 여자를 우발적으로 술김에 덮쳤다"거나 "강도만 하려고 했는데 엉겁결에 ...."혹은 "친구들과 기분내다가 그만..." 식의 유형이 주종을 이룬다. 그리고 가해자나 피해자가 젊은 청소년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98%의 숨겨진 성폭력의 경우엔 이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첫째, 범죄의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이를테면 강도 강간, 데이트 강간, 직장내 강간, 근친강간, 교사나 성직자 등의 신분을 이용한 강간, 어린이 강간, 아내 강간 그리고 각 종류의 성추행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둘째,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모르는 사람(20%-30%)보다 아는 사람(70%-80%)인 경우가 훨씬 많다. 아는 사람에는 이웃집 아저씨, 직장 상사나 동료, 선후배, 친구,데이트 상대, 심지어는 친척이나 가족도 포함되어 있다.

셋째, 피해 여성 연령도 만 3개월부터 70여 세까지 다양하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한국성폭력 상담소의 상담건수 중 만13세 이하의 어린이 성폭행이 전체의 35%를 차지 한다는 사실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어린이 성폭행의 33%가 근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통계에 비추어 볼 때 여자라면 누구라도 성폭력의 피해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가해자의 연령은 10대에서 7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10대보다 30대 이상의 성인 남성이 대부분이다. 직업이나 계층도 각양각색이다.

다섯째, 가해 방식도 다양하다. 어린이 성폭행의 경우엔 과자나 선물, 때로는 용돈을 이용한 유인, 협박 등이 활용되고 성인 여성의 경우엔 물리적 강제(40.9%)보다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강제(56.1%)인 경우가 더 많다. 한국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폭행 사례를 보아도 직장내 성폭행이 전체의 11% 정도인데 상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심리적 경제적 위협을 사용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드러난 성폭력과 감추어진 성폭력의 실상은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2%의 실상만이 성폭력 전체의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특정 유형의 성폭력만 알려지기 때문에 여성의 몸조심, 문단속이 문제되고 피해자도 가해자와 함께 비난받는 유일한 범죄가 되고 있다.


성폭력 피해-심각한 후유증 유발

이제까지 성폭력의 실상이 은폐되어온 것처럼 피해 여성들의 경험도 거의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왔다. 그저 신문에 보도되는 성폭력피해 여성들의 음독, 투신자살 등을 통해서나 간간이 피해 정도가 알려져왔을 따름이다. 그리고 작년에 일어났던 김부남 사건(9살 때 성폭행 당한 후 정신분열, 인간관계 상실,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시달리다 자신의 삶을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가해자 이웃집 아저씨를 21년 만에 찾아가 실해한 사건)과, 올해 초 9살 때부터 13년간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폴행해온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법정에 선 김보은 사건 등에서 성폭력 피해의 처절함이 조금이나마 노출된 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성폭력이 빚어낸 극단적인 피해 사건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 정도가 심각하고 광범위하다. 본 상담소가 성폭력 전문 상담소로 문을 연 지 1년반 만에 쏟아져 들어온2600여건의 상담 사례를 보면 그 피해는 참담할 지경이다. 상담자들은 성폭력이 피해 여성뿐 아니라 한 가정, 나아가 사회전반을 피폐화시키는 사회적 범죄임을 피부로 절감하게 되었다.

1. 신체적 피해

한국사정책연구원 조사(1989년)에 의하면 피해자의 10%가 상해, 12%가 임신, 1.3%가 성병 감염 등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 상담소의 많은 사례에서도 임신이나 질파열 등의 외상이 발견되어 어린아이 성폭행의 경우 성기 구조의 변형까지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파가 파열되는 경우까지를 포함하면 신체적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큰 것으로 나타난다.

2. 경제 사회적 피해

직장 성폭행의 경우 피해 여성들이 도리어 사표를 쓰고 직장을 그만 두는 예가 허다하다. 강간을 당하고도 도리어 강간 피해 사실을 알리겠다는 가해자의 협박에 의해 지속적으로 돈 요구와 성폭행에 시달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또한 임신이나 신체적 손상 치료에 대가도 여성들이 치르고 있다. 가정 파괴범이란 용어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자녀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자녀와의 관계가 크게 손상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체로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성폭력을 당한 피해여성들은 대부분 순결 상실로인한 손상감과 자격지심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순결관은 피해 여성들에게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게한다.

3. 심리적 피해

상담 창구를 통해서 본 바로는 거의 대부분의 피해 여성들은 피해 정도와 지속 정도, 가해자와의 관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두려운과 불안 증세를 나타낸다. 그리고 심한 우울과 좌절감에 시달리며 순결 상실에 대한 자기 비하 감정이 크다. 한편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적개심, 복수심,증오 등의 감정 때문에 삶 자체가 어둡고 피폐화되어 간다. 심한 경우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결혼해서도 원만한 생활을 꾸려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증상을 강간쇼크증후군으로 부르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4. 사회 전반에 끼친 심각한 피해

성폭력은 피해여성의 가저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 가족간의 관계도 손상시킨다. 때로는 살인까지 일어나 양 가족을 불행에 빠뜨린다. 또 성폭행은 매춘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매춘을 하게된 동기의 30%정도가 성폭행 피해로 인한 순결 상실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은 여성의 생활을 제약한다는 데에 있다. 성폭력의 불안감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을 제약하고 행동과 사고의
위축을 가지고 온다. 이는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본래적 권리인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또한 남녀 관계를 적으로 만들어 놓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이렇듯 성폭력은 우리사회 기반 자체를 흔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 대 여성 범죄이자 사회적 범죄이다.

왜 성폭력은 은닉되는가

성폭력의 실체를 보이지 않게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들이다.

잘못된 통념들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실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잘못된 생각들을 마치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념들의 위력은 매우 크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느 것을 더 두려워하고 고소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성폭력은 은폐되어 버리고 성폭력의 심각성이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 때문에 피해 여성들의 극심한 고통이나 후유도 심화되고 있다.

잘못된 생각 1:강간만이 성폭력이다.
우리는 흔히 심한 성추행이나 강간만을 성폭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상대방(여성)의 의사에 반하면서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공포, 불안 등을 주는 모든 성적 행위는 성폭력이다 이를테면 직장 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짙은 농담, 지하철 같은 공공 장소에서의 추근거리기, 성기 노출, 음란 전화, 음란 통신, 아내구타, 인신 매매, 강요된 매춘, 포르노(음란 영화, 비디오, 만화, 음란도서)등도 모두 성폭력이다. 이렇게 보면 성폭력은 우리의 일상 문화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어 있고 모든 여성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크고 작은 성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고 하겠다.

잘못된 생각 2:강간은 폭력이 아니라 조금 난폭한 성관계다.
바로 이러한 통념 때문에 피해 여성은 사건을 신고하지 않고 사실을 은폐시키며 깊은 자책감이나 수치감 , 절망감 등에 빠진다. 강간은 성관계가 아니다. 단지 남성의 성이 공격 무기가 되어 여성의 성을 침해한 폭력행위일 따름이다. 물론 남성 성기의 삽입이라는 행위가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성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 행위다. 따라서 강간당한 여성은 순결을 잃은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것이다. 성폭력을 강도에게 상해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 피해 여성의 심리적 극복은 쉬워진다.

잘못된 생각3:나에게는 일어 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성폭력 문제가 심각하다고는 느끼지만 대부분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생각한다. 그 동안 2%의 성폭력만 알려져 왔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폭력은 특정 연령 계층 혹은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이, 종교, 직업, 교육 정도, 사회적 지위, 용모에 관계 없이 모든 여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잘못된 생각 4:성폭력은 남성의 성충동 때문에 일어나는 우발적 범죄다.

이러한 생각은 '남성의 성욕은 본능적이며 충동적이고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전제된 것이다.. 20세기 성과 학자들에 의해 이것은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본 상담소 사례에서도 70%이상이 우발적 범죄보다는 계획된 범죄로 나타나고 있다. 가해자는 성폭력의 시간과 장소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가해자에 관한 한 연구에 의하면, 성폭력은 젊은 여성에게만, 그리고 노출이 심한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 성폭행이 전체 성폭행의 30%가 넘으며 여름철에만 성폭행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언동에 성폭력 책임을 전가하거나 범죄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 여성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의 성적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회 풍조가 근본적으로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범죄들과는 달리, 비난의 화살을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돌리는 잘못된 논리다.

잘못된 생각 6:대부분의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
실제로 강간 피해는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 의한 경우가 더 많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전체의 70%이상을 차지한다. 이러한 통념 역시 성폭력을 남성의 성충동에 의해 일어나는 우발적 범죄로 보는 인식이 전제된 것이다.

잘못된 생각 7:강간범은 정신 이상자다.
많은 사람들이 강간범은 저소득층의 성격 파탄자나 정신 이상자 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대체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대체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본 상담소의 사례를 통해 보아도 가해자가 정신 이상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직업이나 계층적 특수성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성실한 직업인으로 혹은 착실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소외감, 열등의식, 박탈감, 분노 등을 표출할 대상으로 성적인 공격에 대해 무력하다고 생각되는 여성과 어린이를 택했을 뿐이다.

잘못된 생각 8: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

흔히 '들리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있느냐?'며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간으로 몰고가거나 피해여성의 정조관념이 없는 여성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간범은 많은 경우 말로 위협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때리거나 흉기로 위협하기도 한다. 따라서 피해 상황은 흔들리는 바늘이 아닌 꽉 잡혀 있는 바늘과도 같은 상태다. 피해자인 여성은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으로 저항하기보다 무력해지기 쉽다. 또한 우리의 전통적인, 착하고 온순한 아내 만들기 여성 교육이 여성들에게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만든 것도 큰 요인이다.

잘못된 생각 9:부부간에 강간이란 있을 수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아내 강간을 언급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거나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라며 못마땅해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도대체 아내 강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 구타에 관한 보고서들에 의하면 심한 구타 후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타당하는 아내들은 이 때가 가장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아내에 대한 성적 학대이자 강간 행위다. 왜냐면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신의 몸과 성에 관한 사항을 결정할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되는 성폭력 범죄


잘못된 통념이 성폭력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주요 요인인 것처럼 현행 성폭력 관련법들과 처리 과정도 또 하나의 주요한 요인이다. 현행 성폭력 관련법들과 처리 과정도 또 하나의 주요한 요인이다. 현행 성폭력 관련법들은 기본적으로 강간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과 순결관에 기초한 것으로 피해 여성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하고 있다. 성폭력 범죄의 경우 신고율은 실제 발생건수의 2.2%에 불과하고 기소율도 신고율의 36%에 그치고 있다. 또 가해자가 실형을 받는 것은 기소 건수의 33%에 불과하다. 본 상담소의 경우에도 건수는 사례 총수의 1%정도이다. 힘들게 고소한 경우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때때로 피해 여성이 도리어 무고죄로 걸리기도 한다. 강간 범죄가 4대 강력 범죄(살인, 강도, 방화, 강간)중 가장 기소율이 낮은 것은 바로 성폭력 관련 법과 처리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폭력 범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다. 이러한 법적 개념 규정은 기존의 순결관이 반영된 것으로 성폭력을 여성의 인격에 관한 침해 행위로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정조를 침해한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성폭력을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사회적 범죄로 인식시키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불행으로 보게 만들고 성폭력을 성관계로 인식하게 만들며 순결 상실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다. 이 규정은 보호받을 만한 정조와 보호받지 않아도 좋은 정조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낳고 있다.
그리고 강간 행위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자를 간음한 자로 규정한 조항은 '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없다.'는 통념이 반영된 조항으로 피해 여성이 강간임을 입증하려면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 조항 때문에 피해 여성은 피해를 입고도 제대로 신고도 못하고 도리어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또 남편으로부터 정조관념이 약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또 피해자 당사자만이 고소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친고죄 조항은 강간을 성관계로 보는 기존의 통념이 반영된 것인데 이 조항은 순결이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도리어 강간범들로 하여금 역이용하는 빌미를 제공해 준다. 또한 직계비속이 직계존속을 고소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현행 형사소송법은 근친 강간인 경우 법적인 문제 해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고 있다. 그리고 고소 기간이 6개월로 되어 있는 조항은 사춘기에 가서야 피해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어린이 성폭행 피해자들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현행법뿐 아니라 사법처리 과정도 많은 문제가 있다. 경찰, 검찰, 법정으로 이어지는 조사, 심문 등의 과정에서 강간에 대한 잘못된 통념과 이게 기초한 성폭력 관련 법에 의거한 사법 처리 담당자의 남성 중심적 입장이 문제다. 이로 인해 다른 강력 범죄와는 달리 가해자에겐 정상 참작이 유도되며 피해자는 강간 당시 상황에 대한 진술과 가해자와의 대질 심문등으로 두 번, 세 번씩 강간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패해자의 과거 경력, 직업, 평판, 성경험 유무 등 가해자의 범죄 사실 자체와는 무관한 내용들을 문제삼아 가해자의 처벌을 위한 재판인지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재판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수사 과정 때문에 상처를 입어 포기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불평등 구조와 왜곡된 성문화

성폭력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미비한 사회 제도적 장치를 들 수 있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이미 성폭력을 사회적 범죄로 인식하여 정부차원에서 제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대응책 마련이 매우 미비한 실정이다.
특히 피해 여성들을 위한 지원제도(위기센터, 쉼터, 치료센터 등)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와 같이 강간과 순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팽배한 사회에서 사법 처리과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용기를 내어 신고하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에 사회복지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성폭력 범죄와 직접 관련된 앞의 요인들보다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걸림돌은 우리 사회의 남녀 불평등 구조와 왜곡된 성문화라고 할 수 있다. 강간에 대한 잘못된 통념과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남성 중심적 순결관이 여전히 지배적이며, 이로 인해 성폭력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남녀 불평등한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성이 사회 경제적으로 여성보다 힘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 성문화가 아닌 왜곡된 성문화가 형성되어 성폭력 발생 요인을 기본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의 불평등 분배 구조가 만들어낸 계층간의 갈등과 소외, 정당한 수단에 의한 목표 달성의 어려움, 장시간 노동 구조 등은 살아가는 데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이를 건강하게 해소할 오락 여가 문화가 발달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퇴폐적 성문화, 성의 상품화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남자 어른들이 준매매춘(접객업소에서 일어나는 성상품화를 말함)과 매매춘에서 직접 성을 산다면, 청소년남자애들은 음란 비디오, 성인 오락지, 도색 잡지 등을 통해 '보는 성'을 사며 여기서 배우는 성은 여자를 성적 노리개쯤으로 알게 하는 성이거나 정복적 파괴적 가학적인 성이다. 이러한 성문화가 건강한 성문화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성폭력의 종식을 기대할 수 없다.

드러내기와 극복하기

성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감추어져 온 98%의 성폭력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문제의 본질을 바로 인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개인이 실천해야 하는 것들

첫째, 강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버리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그릇된 순결관을 남녀 모두 극복해야 한다. '나는 위로 받고 도움 받아야 하는 폭력을 당한 피해자다. 법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처벌받아야 하는 자는 가해자다'라는 당연한, 그러나 보기 드문 든든한 배짱을 가져야 개인적으로 성폭력을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성추행에 대해서도 '나만 피하면 되지' 하는 식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둘째, 성폭력 피해 여성이 그들의 피해를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 즉 가족, 반상회, 학교, 직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아이들을 평등하게 키워, 남자아이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넷째, 가정에서부터 올바른 성교육을 시켜야 한다.

다섯째, 왜곡된 성을 조장하는 모든 유해환경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동네 전자 오락 가게의 게임이 음란하거나 폭력적이지는 않은지, 만화 가게에서 음란 비디오는 상영하지 않는지, 부녀회나 학교 어머니회 같은 데서 눈 여겨 살펴보는 것도 환경을 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 제도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첫째, 지역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다각적으로 도와주는 위기 센터나 상담소를 설치하고 피해 여성을 위한 치료 센터나 피난처 등의 사회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현행 성폭력 관련법은 피해 여성의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성폭력은 보다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청소년들이 성역할이나 성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와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이 음란 비디오, 어린이용 주간지 같은 성교육 동화, 스포츠 신문, 도색잡지 등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잘못된 성을 무분별하게 배워가고 있는 현실에 비해 성교육에 대한 정부와 교육계의 투자는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다. 유아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성교육, 이에 대한 정책적 후원이 그 어느때 보다도 시급히 요청된다.